증인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증인 (행 1:8)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증인. 그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말하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그가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전하고자 일어섰습니다. 베드로는 부정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겁쟁이였습니다. 그가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곧 이어서 첫번째 설교를 합니다. 그는 타협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았습니다-예수님은 배반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하셨고,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베드로는 심지어 자기 자신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고, 모인 사람들이 얼마나 사악한 지도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설교 초보자였는지는 몰라도, 제법 잘 했습니다-듣는 사람들이 마음을 찢고 “우리가 어찌 할꼬?” 울부짖었습니다.
솔직히, 하나님의 성령이 이 모든 일을 하신 것입니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설교의 위대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슬라이드도 없었고, 후렴도 없었고, 소리지르거나 부르짖음도 없었습니다. 보여주는 이야기거리도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단지 그가 아는 것만을 말했습니다 … 그것이 바로 증인이 하는 일입니다. 초대교회가 갑자기 120명에서 3,120명으로 부흥했습니다. 교회부흥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26배 증가입니다. 첫번째 설교치고는 나쁘지 않은 셈입니다. 저는 성경을 드는 것조차도 신경쓰일 때가 있습니다. 저는 3000명이 부흥한 것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그날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저는 사람들이 듣기를 원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물을 간절히 바라는 말라있는 사막과 같았고, 베드로의 설교는 바로 그 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확신하기를 우리들의 친구나 가족이나 커뮤니티가 예수님에 대하여 듣고 싶어하지 않고 흥미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시대가 기독교나 기독교인들에게 대하여 격렬한 적대감을 갖고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 정도는 그것이 당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하여 알고 싶어하지 않거나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희 식구는 아이다호 중부에 있는 작은 농촌마을, 제네시 출신입니다. 제 형과 저는 여름방학 때 한 두 주를 할아버지 댁에 머무르곤 하였습니다. 다른 작은 마을처럼, 마을 어귀에 작은 공동묘지가 있었고, 저의 선조들이 거기에 묻여 있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고나서는, 거기서 장례예배를 많이 인도하였습니다. 15년 전 여름에 저의 이모님 한 분의 하관예배를 집례하기 위하여 엘에이에서 시애틀로 비행기로 가서 5시간 반 동안 운전을 하여 아이다호로 가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어머니가 8자매 중 하나로 태어났기에 많은 이모님들이 계십니다.
제가 1000명이 안 되는 작은 마을에 도착해서, 시내로 들어설 때, 저의 삼촌의 보험회사 사무실을 보았고, 할아버지가 일하시던 우체국을 보았고, 다른 삼촌과 사촌들이 운영하는 건축회사를 보았습니다. 할아버지 옛집을 지나서 고속도로에서 나와서, 수십 년 동안 할아버지가 일하시던 곡물창고를 지나서 비포장도로로 들어섰습니다. 공동묘지는 풍성한 파루스 농장의 수천 에이커를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거기에 저는 이미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큰삼촌을 장사지냈고, 2010년 그 날은 Rae이모를 장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백파이프로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짧은 하관예배에 한 75명쯤 모였습니다. 예배 도중에 농작물에 약을 뿌리는 비행기 소음으로 잠시 멈추어야 하곤 했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제가 아는 분들이었습니다. 최소한 그분들의 가족을 알고 있었습니다. 연령별로 보면 8개월된 아기로부터 90세 된 노인까지 있었습니다. 거기에 제 어머니의 사촌인 밥이 계셨는데,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모인 사람들을 보면서 다음 번 장례 차례는 누가 될까 헤아려 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가족에게든 밥과 같은 분이 계시지요?! 그리고 거기에 오토바이 사고로 한 다리를 잃었지만 아직도 가족농장에서 농사를 하고 있는 항상 거친 사촌형 존이 있었습니다. 그가 성경을 한 구절 읽고, 곤자가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또 다른 사촌 더그도 읽었습니다. 저의 막내 누이와 타운에서 온 다른 사람들도 그 때에는 살아있었고 참석을 하였습니다. 그 중 몇 분은 1952년에 Rae 이모님과 함께 제네시 고등학교를 졸업하신 분들이셨습니다. 다 합친다면 마치 모트리 크루 밴드 그 자체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크리스챤이셨고, 대부분은 교회에 발도 안 들여 놓으셨던 분들이고 몇 분들은 선천적으로 착하신 분들이지만 나중에 저에게는 ‘이교도’로 분류되신 분들입니다. 재미있는 가족분들이 … 교회처럼 그렇지 않은 많은 분들이 언덕 위에 모였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마지막 부분은 짧은 설교를 나누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 바깥 기온이 95도였기 때문에 아주 짧게 해야 했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거룩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언덕 위에 많은 분들이 계셨습니다.). 제가 성경을 읽을 때, 갑자기 조용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둘러보니까 모든 분들이 주의를 집중해서 듣고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자 앞으로 기울이고 계셨습니다. 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말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김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니라”
그리고 완전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분들이 알던 모르던 간에 왜 그렇게 많은 분들이 거기에 왔었어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물론 그분들이 단지 예의를 표하고 의무를 다하고자 오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은요? 저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하여 듣기를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생사가 달려 있는 상황에서는, 우리 모두가 말라있는 사막과 같고, 간절히 물을 찾습니다 …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그 물이십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들의 말이나 통계는 복음을 듣고 싶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분명히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끌고 있는 믿음 공동체가 전도하고 믿음을 나누고 싶다면 … 우리 자신의 생활모습과 말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제대로 전하고 있는지를 먼저 점검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복잡한 것도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매우 단순합니다-단지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단바움가트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