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인

위드비 섬은 시애틀 북쪽에 있는데, 짧은 자동차 드라이브와 페리를 타면 바로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 섬은 수년 전에 오두막집을 장만한 우리 가족에게는 성지와 같은 곳입니다. 우리 가족은 7월에 같은 지역에 있는 친구의 해안가 집에서 1주일 휴가를 보낸다는 것에 매우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앤과 저는 올림픽 산맥을 바라다 보이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장소에서 훌륭한 리듬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읽고 뛰고, 카약을 타고 보드를 노젓고, 하이킹을 하고 해변가 산책을 하면서 수많은 사슴과 토끼 그리고 대머리 독수리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물수리 가 있었습니다.

물수리는 때로는… 시호크로 불립니다.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이지만, 이제 여러분들은 어떻게 시애틀 NFL 미식축구팀이 그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아셨을 것입니다. 물수리는 크고 아름다운 것이 마치 대머리 독수리처럼 보이는데,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면 배에 점이 있고 크기는 약간 작습니다.  

저는 뒷뜰에 앉아서 반복해서 펼쳐지는 자연의 드라마를 보고 있었습니다. 한 마리의 물수리가 수면 위30-40 피트 상공에서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면서 활공을 하고 있었습니다. 돌고 돌면서 물 속에 있는 생선을 찾으면서 돌고 또 돌면서 확인했습니다. 아마 20분 정도 지났을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새는 부리를 아래로 향하고, 몇 번 날개짓을 하더니, 몸 옆에 날개를 딱 붙인 채로 완벽한 카미카제 식으로 앞부분으로 입수를 하는데 다리가 먼저 들어갔습니다. 올림픽 다이빙 챔피언도 물수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30-40피트를 그대로 돌이 떨어지듯이 내려가서 마치 아이들이 높은 곳에서 물에 포탄처럼 다이빙하듯이 수면을 치고 물 속으로 직행합니다. 그리고 몇 초간은 완전히 잠수를 해서 먹이를 잡으려고 하기에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물수리는 몇 번 실패하기도 하지만, 발톱으로 생선을 잡을 때까지 계속 합니다. 매번 시도할 때마다, 그 새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헌신. 올인입니다.    

저는 설교 예화나 신앙의 새로운 유추법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전혀 아닙니다만 이 모습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앉아서 썰물을 바라 보고, 올림픽 산맥의 어렴풋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나는 올인을 하고 있나? 100%? 저는 친구들, 가족, 결혼, 신앙과 마지막으로 목회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담임목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내가 올인을 하고 있는지, 내가 나의 모든 것과 최고의 것을 주님께 드리고 있는가? 주님을 따르려고 나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고 불편한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빙빙 돌기만 하다가 내 날개를 완전히 접고 물 속에 들어가기 보다는 살짝 발끝만 물에 담그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 날 우리가 신앙과 목회를 논할 때, 대화가 종종 밸런스를 유지하는 쪽으로 향합니다. 누군가가 너무 영적일 때, 너무 헌신할 때 또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너무 말로만 하는 것 같을 때, 우리는 그들의 생활이 혹시 건강하지 않은지를 염려합니다. 그래서 최근에 우리가 가드레일과 경계선을 만드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다음 세대 목회자들은 그들 자가 관리에 대하여 끊임없이 물어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몇 십년 동안 목회는 발란스를 잃어버렸고 다시 중앙으로 돌아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계추를 반대쪽으로 너무 많이 밀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희생이니, 제자도를 위한 대가를 치루는 것이니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는 지나간 일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것에 대하여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기 때문에 (나를 따르는 자들은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잃는 자는 오히려 생명을 얻는 자다, 누구든지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 등)… 약간의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일 것입니다.   

이번 주에 저는 리챠드 버넷이 지난 봄에 Theology Matters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내용을 쓴 글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리챠드는 제가 대부분 들어본 적이 없는 히틀러와 나치의 바람이 독일에 불기 시작한 1930년대의 많은 이야기들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칼 바르트와 디트리히 본회퍼는 독일의 교회들이 어렴풋이 나타나기 시작한 어려움들에 대하여 준비를 잘못하고 있다고 염려하는 사람들 중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준비되게 하는 심각한 일이 진행되던 중에, 본회퍼는 갑자기 런던으로 가서 두 개의 작은 독일 피난민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처럼 중요한 시기에 18개월 동안의 부재는 너무도 뚜렷하게 티가 났습니다.

본회퍼가 런던에 있는 기간에, 그는 변명하기를 자신이 개인적으로 꼭 필요한 “광야생활”이라고 했습니다만, 그는 자신의 멘토인 바르트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바르트는 본회퍼가 왜 갔는지 묻거나, 독일로 돌아오라고 재촉하는 말을 강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너의 영국으로의 후퇴를 다른 것이 아닌 꼭 필요한 개인적 휴식으로 여긴다,”라고 바르트는 적어 나갑니다. “딴 말 할 것 없이 ‘베르린의 네 자리로 속히 돌아오라!” 바르트는 본회퍼에게 지금 이 때는 개인의 필요함이나 약함이 교회가 처한 심각한 위협에 비해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르트가 매우 예민한 시기에 “따금한 사랑”의 말을 한 것에 대하여 동의하시거나 반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오늘 날 이런 말을 듣기가 거의 힘들다는 것입니다. 경계선을 긋고 자신을 돌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 듯 보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건강한 돌봄이 없다면, 우리가 줄 것이 과연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요? 물론 있습니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나 리더로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값을 치루는 노력입니다. 또 다른 관점으로 보면, 순수한 신앙은 위험을 감수하거나 희생을 치루거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이라면 망설이지 말라는 선언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온 맘과 영혼과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올인은 단지 위험을 부담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라고 하실 때, 봉사하거나 복음 증거하라고 하실 때, 어려운 상황 속일지라도 “예”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제 염려는 우리들이 발란스나 가드레일에 둘러 싸여서, 그 명령을 듣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의 날개를 접고 물 속에 뛰어드는 것 대신에, 발끝에 물만 적시는 것이 될까 하는 염려입니다. 편안하고 조심스럽게 할 것인가, 아니면 올인 할 것인가… 당신은 어디 편에 서 계십니까?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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