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모습의 내가 될 것인가?

어제 저는 크리스마스 장식의 남은 것들을 다 치웠습니다. 저는 주현절까지 최소한 몇 가지 장식을 남겨 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2026년을 맞이했습니다. 얼마나 빨리 세월이 지나가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실 때면 이미 대강절의 기다림과 성탄절을 준비했던 것, 그리고 일년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새해의 시작이 이미 지나간 추억이 됐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세윌이 너무 빨리 지나갑니다. 저는 요즈음 새해의 결심을 하지는 않지만, 한 해의 마지막과 새해의 시작을 돌아보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지난 해를 정리해 보려고 하는데 이미 정리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크레딧카드 회사에서는 제가 사용한 내역을 잘 분류해서 보내 줍니다. 스포티파이는 일년 동안 제가 듣던 음악 습관을 정리해서 알려 줍니다. 저는 달리기와 자전거 타기를 얼마나 달렸는지를 (스트라바가 정리해 주기도 합니다만) 기록하고, 제가 읽었던 책들을 기록해 둡니다. 그 매력적인 일은 제게 습관만이 아니라 가장 먼저 하는 우선순위입니다.

지난 해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새해에 일어날 좋은 일에 대하여 왜 그런지 생각하는 시간이 좋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2026년에 할 일 (행사)에 대하여 많은 시간을 쏟고 싶지 않고, 제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성품)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두번 째 질문인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큽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할 일을 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되고 싶은 사람은, 온 마음과 힘과 열심을 다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물론 말은 쉽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2026년은 미국이 매우 힘든 도전의 해가 될 것은 분명합니다, 이미 새해 한 두 주간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뉴스에 나오는 단어는 체포, 소유, 통제, 추방, 무력, 스트라이크, 파괴, , 목표, 지배 가 대부분이었습니다. 1960년대에 유타 출신 국회위원이고 내무부 장관이었던 스튜어드 우달의 말이 이처럼 적합한 적이 없었습니다: “두렵지만 우리는 위대한 힘에 대하여 잘못 알았습니다.” 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제어하거나 강압이나 위협으로 다른 사람들의 의지나 어젠다를 부과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위대함이라는 것이 우수함과 영감, 우리 세상을 증진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라면, 우리의 신앙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힘과 위대함은 잘 사용되거나 잘못 사용이 될 수 있습니다만, 궁극적으로 위대함은 목적과 인내를 갖고 있는 듯 합니다. 우리가 이 둘을 잘못 알 때, 실제로 우리 문화와 교회에서 점점 일어나고는 있습니다만, 우리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복음에서는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됩니다. 

저는 최근에 이사야에 나오는 4개의 종의 노래 중 하나인, 이사야 42장 몇 구절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믿기는 이 구절은 에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된 것입니다. 마태는 마태복음 12장 17절에서 21절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종의 노래는 현재 인식되어진 것과는 매우 다른 하나님의 메시야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요즈음 이론적으로 예수를 ‘회복’하는 어떤 그룹에는 매우 유행되고 있는데, 그 동안 예수님은 너무 오랫동안 온유하고 온순한 모습으로 인식되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근육질이고, 무장세력적이고, 권력행사를 하는 예수님으로 돌아가야 할 떄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모습이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에 나오는 종의 모습은 다른 지도자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사 42:2).” 아니, 뭐라고요? 학생 지도자들도 정치나 교회에서나 효과적인 리더는 주의를 끌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디아에 노출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인스타그램, 틱톡의 존재, 책 발간, 많은 양의 문자발송이나 이메일 주소 관리, 염증성의 코멘트 등입니다. 그 모든 것은 영향을 끼는 것에 있습니다. 알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권력을 얻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종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위압적이고 위협하며 외치는 지도자들과는 달리, 종은 자기의 성품이나 행동을 통하여 그의 목소리보다 더 크게 외칩니다. 예수님의 위대함 가운데 한 가지는 예수님은 대부분의 생애를 외딴 마을에서 엉뚱한 사람들에게 선거운동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의 마음을 잡으셨고, 믿는 자들은 예수님이 이 지구 상에 알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상한 갈대도 꺽지 않으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사 42:3).” 상한 갈대는 쓸모가 없고, 꺼져가는 등불은 촛불이 거의 다 타서 곧 없어진다는 것입니다만 … 메시야는 끄지 않습니다. 그는 강제적으로 리드하지 않고, 정말 약한 자들과 우선순위에서 밀린 자들을 인정하십니다.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쓸모가 있습니다. 그 누구도 끝나지 않습니다. 종의 임무는 강한 자를 모으거나 힘을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사 42:3).” 제 번역은: “그가 바로 잡을 것이라.”

2026년도에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용기와 다른 힘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 대가를 치룰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진리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도전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일랜드 작가 클래리에 키간은 이와 같은 작은 것들이라는 제목의 놀라운 짧은 책을 몇 년 전에 썼습니다. 그 내용은 아일랜드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고난의 이야기인데, 종교적인 규율로 말미암아 여자들, 특별히 임신한 십대 소녀들이 고난을 받았던 것인데, 종종 감금되거나 끔찍하게 불합리적인 취급을 받거나 노예노동(그 유명한 “막달레나 세탁소”)을 강요당했습니다. 그 마을사람들은 그 마을이 수십 년 동안 암흑의 지역이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누구도 진실을 마주 함으로 추방당하거나 더 나쁜 일을 당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지역에서 빌 퍼롱이라는 석탄을 파는 상인이 크리스마스가 다가 오는 바쁜 시간에 그는 소녀들 중 한 소녀를 개인적으로 만나는 상황에서 비틀거리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침묵하는 사람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진실과 마주치게 될 때에 … 무엇을 하였나요? 저는 작가의 뜻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원합니다. 그가 걸어가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반대하는 용기가 없이… 몇 년을, 수십 년을, 평생을 자신을 크리스쳔이라고 부르고 자신의 얼굴을 거울 속에서 보는 것이 가능한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그것은 우리가 권력을 예수님의 위대함보다 더 찬양할 때 항상 일어나는 일입니다. 새해가 되었습니다 … 어떤 우리가 되기를 원하시나요?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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