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직한 심오한 질문

저는 대화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에서 좋은 친구와 커피 한 잔을 나누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불쑥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 속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 친구는 초신자가 아닙니다. 그는 오랫동안 예수님의 제자였고, 신학적으로 단단하고, 사는 동안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몇 번씩 체험하고 매일 같이 활발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바로 알아차렸듯이, 이런 때는 “자, 여기 C. S. Lewis 책인데 읽고서 내일 아침에 전화하자.”라고 말할 때가 아닌 것이지요. 내 친구는 이미 깊이 들어가 있었는데, 더 깊이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어떻게 그런 일이 생긴 걸까요?

저는 일주일 내내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제 친구가 그 대답이 필요할 뿐 아니라 저에게도 그 대답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도움이 된다면 당신도 그 대답이 필요할 것입니다. 저는 무언가 해야 할 특별한 일들의 리스트를 만드는 것을 가능한 피하려고 했습니다. 신앙이 깊어지는 간단한 10단계도 없었고, 이미 꽉 찬 체크리스트에 더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실생활 가운데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믿음을 발전시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한 번 이 생각을 하시던지 안 하시던지, 실천할 수 있는 특별한 영성훈련에 관한 좋은 자료들(기도, 금식, 영성일기, 고백 등)을 찾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입니다. 리챠드 포스터,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 존 마크 코머, 달라스 윌라드, 아빌라의 테레사 … 스승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순서없이 저는 그리스도와 깊어지는 것에 대하여 여러분이 생각할 것들을 적어봅니다.

a)      누군가와 시간 보내기 당신이 신앙에 대하여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와 시간 보내기. 저는 지금 멘토/멘토리의 관계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그건 나중에 특별한 계획의 부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저는 당신 주위에 있는 분들 가운데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분들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어느 한 분을 찾아내는 방법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안에서 생활하는 것에 대한 배움은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 분들을 화나게 만들겠지만 삼투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삼투현상이란 “어떤 아이디어나 지식의 점차적이고 무의식적인 동화의 과정”을 말합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 대하여 누군가를 충분히 알 수 있게 지내거나 그리스도와 함께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분은 크리스챤들 가운데 알려져 있거나 유명한 분들이 아닙니다. 전혀 모르는 유명한 분들 가운데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아마 당신 주위에 있는 분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이 존경하는 그 깊이 있는 신앙의 소유자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했을 때 바로 떠 오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b)     오랫동안 지켜 보기. 깊이라는 것은 차곡차곡 쌓이는 것입니다. 어떤 분하고 시간을 보내는데 땅이 흔들리지 않거나 하늘이 밝아지지 않더라도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신에게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 두 번 만나서는 당신이 무언가를 배운다거나 자란다거나 도전을 받는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떠나거나 도망치거나 만남을 끝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오랜 기간 거기에 머물러야 하는데 참 변화는 쌓임에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느끼지 못할 때 일어납니다. 우리는 즉흥적인 결과와 순간 순간 어떻게 느끼는가에 중독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둘 다 저항해야 합니다.   

c)      당신 자신을 아름다움에 노출시키세요. 야외에 나가서 창조의 오묘함과 경이로움의 체험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좋은 문학작품을 읽거나 시를 음미하거나, 아이들이나 손자들의 기적을 바라보거나, 사람들 가운데 있는 놀라운 다양함을 알아채거나, 미술 박물관이나 갤러리를 가 보거나, 깊이 있는 영화나 좋은 쇼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창조는 한이 없으시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아름다움 속에 들어갈 때 숨이 막히고 무언가 일이 생기는 것을 알아 차리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열리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단세포동물에서 우주까지, 빙하에서 대양까지, 얼룩진 새끼 사슴에서 석양의 광합성까지 그리고 모든 영원함을 한 마디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감동이 됩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은 우리를 예술가(창조주)에게로 이끌어 줍니다.

d)     예배드림. 물론 목사님들이 말하는 것이지만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배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의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예배는 우리의 선입관을 정지시키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게 하는 방법이다”라고 말하셨습니다. 정말 지금 요즘 시대에 모든 교단에서 드리는 각가지 형식의 예배는 형식이든, 개인 취향이든지 예배의 질적인 면도 … 내 자신을 온전히 드려 드리는 예배보다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이 온전히 드리는 예배를 자연이나 산에서 묵상기도 시간에 드릴 수 있나요? 물론 드릴 수 있지요. 그러나 길게 보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합니다. 서로의 기도, 은사, 목소리와 존재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함께 예배를 드릴 때 함께 주님께로 걸어 나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혼자의 노력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임스 K.A. 스미스가 말했듯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소원을 바로 잡고, 우리의 입맛을 유지하는 곳입니다.”  

e)      공의를 행하는 것. 짧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바로 잡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언가를 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일과는 정반대가 되는 잘못된 너무나 많은 것들에 걸려 넘어지고 있습니다. 바로잡아야 하는 일 몇가지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인종차별, 환경파괴, 총기폭력, 빈부격차, 이민자들의 처우개선, 등 항목들은 끝없이 나열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일을 하는 동기는 그냥 좋은 일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시기를 원하시는 소원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에 귀결이 되고 맙니다.

f)       침묵하는 것을 배우십시요. 이것은 분명히 대인관계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말하는 대신에 무언가 질문을 하고 듣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특별히 홀로 있음에 대하여 말하고 싶습니다. 침묵을 연습하시기 바랍니다. 생산적이지 않거나, 효율적이 아니거나, 말하지 않거나, 팟케스트를 듣지 않거나 해도 편하게 될 때까지 연습하십시요. 침묵. 침묵한다는 것은 처음에는 꿈틀거리고 싶고, 무언가 성취할 것을 찾고 싶고, 누군가에게 문자메세지를 보내고 싶을 것입니다. 침묵을 통해서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게 될 때까지, 마음 속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침묵을 통해서 자신의 숨소리를 듣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 해야 합니다.

g)      성경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요. 읽고, 반추하고, 생각하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공부하고, 말씀으로 변화가 되십시요. 정기적으로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대체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된 것은 N. T. Wright께서 그의 책 단지 크리스천: 공의, 영성(초월성의 깨달음), 의미있는 관계, 그리고 아름다움에서 말한 범우주적 인간의 바람이라고 정의한 것과 거의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Wright가 생각하기를 이런 것들이 모든 인간들이 인지를 하던지 못 하던지 바라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날 수 있고, 우리는 서로 그리스도와 일생을 … 더 깊은 곳에서 … 보낼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단 바움가트너

Next
Next

A Modestly Profound Ques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