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부류의 사람들
저는 톰슨 윌더의 우리 마을 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본 것을 기억합니다. 극중에 나오는 에밀리는 출산 중에 죽어 지역 공동묘지에 묻힌 죽은 영들 중에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그 영들이 서로 대화하는 배역 중에 하나입니다. 어느 날 그는 굵은 목소리의 무대감독인 해설자에게 혹시 그녀가 하루만 삶으로 돌아가기를 요청합니다. 그녀는 허락을 받았고 평범한 세상의 심오한 아름다움에 충격을 받습니다 …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런 아름다움에는 전혀 아랑곳 없는 모습에 화가 나고 실망하게 됩니다. 하루가 끝나고 공동묘지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무대감독에게 묻습니다. “그 어떤 한 사람이라도 자기가 사는 생애를 어떤 것인지 깨닫고 있나요?” 무대 감독은 잠깐 생각을 하고 대답합니다. “아니요, 아마도 성자들과 시인들만 그럴 것입니다”
성자들과 시인들. 대부분 하나님께 집중하는 사람들, 그리고 대부분 세상의 실상을 보는 사람들 그 외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성자들과 시인들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시대에, 특별히 현 미국의 시대에 대부분의 성자들과 시인들은 별종으로 여겨집니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유명인들이 아니고, 부자도 아닐 뿐 아니라. 대부분 경우에 거의 힘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영향을 미치는 그룹에서도 최하위에 속합니다. 그들은 비인기적인 확신에 붙잡혀 기발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윌더가 말하기를 “그들이 살고 있는 인생을 깨닫고 있기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 정의가 정말 나쁘지 않습니다. 부류가 다른 사람들.
상당수의 여러분처럼, 저는 현재 우리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지나치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권위주의적인 법령, 법적 절차의 생략, 반인종주의 시위의 제거, 동맹들과의 단절 … 이 모든 것들이 절망하게 하거나 분노하게 합니다. 저는 정치에 대하여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좀더 근본적인 이슈-인간 대접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커피숍에서 사람들이 논의하는 문제들이나 토요일 아침에 피켓을 들고 데모를 하는 것보다 더 깊은 우려를 갖게 하는 것은 긍휼 자체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긍휼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첫번째 덕목일 것입니다. 우리가 받았기에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 대하여 문자 그대로 “함께 고통을 겪으신” 긍휼의 마음을 가시셨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함께 고통을 겪는 것은 우리의 감정과 동정, 불편함, 대가를 치루는 것, 육체적인 희생, 우리의 기도, 그리고 우리의 금전이 포함되는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경험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들에 더하여 우리들을 위하여 우리와 함께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인종문제와 이민문제, 빈부문제, 우정과 정의 문제는 긍휼의 안목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개인이건 국가이건 나 먼저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나머지 부스러기로 소외된 사람들이나 세계 사람들에게 갖게 하는 것은 모순된 생각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긍휼을 받았기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작년에 로스앤젤리스 랍비 샤론 브루스는 뉴욕타임즈에 글을 게재했습니다. 그 글에서 그녀는 미슈나에서 옛 유대인들이 행하는 것들을 썼습니다. 수십 만 명의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삶의 중심인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예식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순례자들이 계단을 올라서 커다란 성전 광장에 들어가서는 오른쪽으로 돌아서 시계반대방향으로 도는 군중에 합류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상한 자들-애통하는 중에 있거나, 병들었거나 외로운-은 왼쪽으로 돌아서 시계방향으로 돌며 수많은 군중들과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합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변, 그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마주 하면서 물어봅니다. “왜 마음이 아프십니까? 무슨 일이시죠?” 그 대답은 누군가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것이거나, 인간관계가 깨진 것이거나, 누군가가 아픈 것입니다. 그 대답을 들은 사람은 축복을 하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다시 돌기 시작하고 누군가가 애통하는 사람을 멈추어 세울 때까지 계속 걷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누군가와 인사를 하는 것과 다르지만, 공동체가 긍휼을 실천하는 한 방법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그 의식으로 인한 영향은 심대한 것이었음은 분명합니다.
한 사람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긍휼을 심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직장을 잃은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도주의적 유산을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나라들의 생명을 살리는 약품 지원금을 깍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동맹들에게 등을 돌리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행동들과 그 배경에 있는 태도는 실제로 사람들을 긍휼로 대하는 우리들의 민감성이 사라져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좋아하고 선택한 사람들하고만 긍휼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긍휼을 나눠야 할 때 더 힘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 시인일 것입니다. 오레곤의 계관시인이었던 킴 스태포드가 다음의 짧은 시 한 편을 썼습니다:
적들의 필요를 채우라
너의 적들의 상처와 흔적을 물어 보아라.
적들의 문제의 숨겨진 원인을 찾아 보아라.
적들의 자녀들을 먹여라.
그들의 고향을 향한 음성을 들어라.
그들의 우물을 고쳐주어라.
그들의 눈물의 역사를 배워라.
그들의 선한 일들을 추적해 보아라.
그들의 노래를 물어 보아라.
차를 나누고 빵을 나누어라.
저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우리들의 긍휼을 위협하는 행동이나 태도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언가 달라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너무도 아름답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벧전 2:9-10).
우리가 조금이라도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조금 더 긍휼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부류의 사람들. 즉, 성자들이나 시인들처럼.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댄 바움가트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