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한계

친구 목사님들께, 15호                     2021년 10월 7일     단 바움가트너

한계

          저는 볼링을 잘 못 하지만 저녁 한 때를 즐기기 위해서 제 아이들을 볼링장으로 데려간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렸을 때 재미있었던 것은 볼링장 매니저가 볼링레인 옆 홀에 빠지지 않게 범퍼를 대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범퍼는 볼링볼이 옆으로 빠지지 않고 레인에 머물게 하고 몇 개의 핀이라도 넘어지게 만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범퍼는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때는 볼 스피드가 너무 느려서 핀 근처에 가지 못 하고 서거나 간신히 핀이 있는 곳에 도달해서 한 두개를 간신히 건드려서 쓰러뜨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범퍼의 존재로 인해 아이들이 볼링볼을 옆으로 빠져서 재미없는 것을 막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범퍼가 있으므로 아이들은 재미있게 놀 수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 문화가 자유라는 개념을 매우 왜곡시키고 있다고 느낍니다. 어느 곳에서나 듣고 있습니다. 분명히 대부분은 자유란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참 미국인이란 자신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고,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누구도 간섭을 안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뉴스에서 거의 매일 듣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스크 또는 백신, 이민정책 또는 총기소지권리 아니면 수정헌법 1조에 대한 것이든 말입니다: “누구도 나를 간섭할 수 없다.” 제한도 없고, 범퍼도 없습니다.

저에게는 현재의 우리 문화와 많은 단절이 있습니다. 보통은 저를 그리 혼란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스리는 것은 이런 왜곡된 자유관이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 신자들 사이에서 지지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그 어떤 한계와 제한도 반미주의자로 여겨지고 따라서 반기독교적으로 꾸며진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사람들과 이런 대화를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우리는 우리 교인들을 더 나은 성경적인 이해와 깊은 신앙의 성숙으로 가르치고 인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내 자신의 상황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간섭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훈련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제한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말 우리 볼링레인에 범퍼가 필요합니다. 한계와 제한은 사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구속시키는 대신 우리를 더 번창시켜 주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한을 선택하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그런 제한들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계십니다. 십계명, 주기도문,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돌아보는 사명(빌 2:3-4), 그리고 예수님과 복음전파를 위해서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것(막 8:35)들은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것이라도 하는 것의 잠재적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범퍼들입니다. 물론 이런 제약들은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쉽게 그 제약들을 치명적인 율법주의로 만들 수 있습니다.

현재 “제한 철폐”로 규정되는 자유를 부르짖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와는 전혀 다른 종류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사람들이 지향하기를 원하시는 자유와 다릅니다. 참자유, 기독교인의 자유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제한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까지 포함된 것입니다. 우리는 제한에 대한 현명한 선택을 할 때 정말 가장 자유로운 것입니다. 영국 성공회 티쉬 헤리슨 워렌 신부는 9월 26일자 뉴욕타임즈 칼럼란에 이런 내용을 적었습니다. 그 칼럼은 https://www.nytimes.com/2021/09/26/opinion/choice-liberty-freedom.html 에서 보실 수 있고 읽을 가치가 있는 내용입니다.

여러분이 목사님이나 신앙지도자라면 교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저는 최근에 제가 생각하는 것에 걸림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 자신이 배우기 전까지는 참자유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죠?! 목사로서 자신이 먼저 실천하고 그 다음에 목사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약을 실천하고 있나요? 다른 사람들을 우리보다 앞서서 생각하나요?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분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제한하는 모델이 되고 있나요? 우리는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하는 범퍼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나 책임의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나요?

크리스챤 투데이 팟캐스트 연재물인 “마즈 힐의 흥망성쇠”를 듣는 목회자라면 무서워 죽는 느낌일 것입니다. 아니면 최소한 깊은 심사숙고와 대화를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책임을 추궁합니까? 그 모습은 어떠한 형태입니까? 지나치게 독립적이거나,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거나, 자신의 권리나 명성, 또는 업적을 너무 걱정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안중에 없을 때 잘못되었다고 말해 줄 사람이 있는지? 누군가 범퍼로서 역할을 해 달라고 부탁할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으신지요?

마이크 코스퍼의 흥망성쇠 시리즈의 새되고 맑은 가치는 한 지도자나 교회의 붕괴가 아니라 왜 교회에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반복해서 리더쉽에 세우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 성숙함에는 자기절제와 제약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자유는 감옥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것이 있을 때 우리가 속한 커뮤니티는 자유스럽게 섬길 수 있게 되고 우리 대신에 예수님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볼링레인에 범퍼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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