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순종과 놀라우신 부르심

오랜 순종과 놀라우신 부르심

저는 이번 달에 이 곳 저 곳에서 오랫동안 생각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휴가 때에는 뉴저지주 저지시에 있는 우리 딸 Dana와 사위 Ted와 첫 외손녀 Ellie Anne (말씀만 하시면 수백 장의 사진을 보내 드릴 수 있습니다) 집 지붕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친구 레이 가시아와 부인 미셀과 저녁시간을 함께 하러 필라델비아로 향하는 기차에서. 맨하탄에 사는 아들 제시와 부인 안나를 만나러 20분 동안 뉴욕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아들 닉과 부인 제니를 보는 동안 유니온 호수 주위를 뛰면서. 시애틀 교외에 있는 휘드비 섬에서 자전거를 오래 타면서, 그리고 에어앤비 집 데크에서 대머리 독수리와 물수리, 사슴과 해변가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토끼들을 보는 며칠 동안 오랜 시간 생각과 기도를 했습니다. 한 달 휴가 동안 숙고할 수 있는 좋은 기간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앤과 저는 데크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아침묵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정한 방법은 복음서에 있는 구절을 무작위로 읽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마가복음 5장을 뽑게 되었습니다. 귀신들린 청년의 이야기인데 너무 길어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어 불쌍한 청년을 고쳐 주신 후의 구절만 적겠습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막 5:18-20)

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에 놀랐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인지 아셨나요? 예수님은 그저 함께 있고 싶어하는 한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곁에 있고 싶어 하는 한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이럴 수가? 아마도 그 청년은 예수님께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청년이 13번째 제자가 되기를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정말 예수님이 거절하신 걸까요? 그러실 수가 있나요? 그러셨습니다. 요청이 좋았던 것 만큼 예수님은 그 청년의 동기에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 속에 다른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다. 새로 만난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하는 청년의 바램보다 더 중요한 (이웃에게 좋은 복음을 나누라는) 소명이지요.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알아서, 느끼는 대로 따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많이 듣고 있습니다. 우리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한 분이신) 프레드릭 뷰크너 말씀을 암송할 정도로 인용을 해 왔습니다: 당신의 인생 소명은 세상의 가장 필요와 당신의 가장 기쁨이 만나는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것이 맞지 않는다면? 아니, 최소한 항상 맞는 것이 아니라면?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큰 기쁨이 하나님이 나타내신 바람과 맞지 않는 것이라면?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귀신이 쫓겨 난 청년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마음에서 느끼고 싶어하는 욕망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시편 기자가 말하기를,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 37:4)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내 마음에 소원을 넣어 주시는 것이 내 자신의 것보다 낳은 것이기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지요. 저는 제 자신의 소원이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만일 저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과 같지 않다면, 결국 이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누구의 소원이 더 중요한가? 내 소원, 아니면 주님의 소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이미 그 답은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님 되심은 항상 저를 이 질문에 이르게 합니다: 내가 순종할 것인가 아닌가? 순종은 특별히 잘 사용되는 단어가 물론 아닙니다. 그 말은 무조건 신뢰하고 내가 선호하는 것과 마음을 내려놓고 마지못해 서가 아니라 기쁘게 순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장 잘 팔리는 좋은 삶의 방법에 대한 책에서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 일생 동안 앤과 제가 중요한 결정을 내렸던 때를 돌아 보았습니다. 30대 중반에 사업 경력을 내려 놓고 신학교에 가는 부르심을 포함해서 다섯 번의 큰 결정이 있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원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계획하고 실행한 결정도 아니었고, 세상에서 잘 알려진 필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순종하느냐 아니냐는 선택만 주어진 멀리 있는 부르심 이었습니다. 기차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고 차장이 타라고 해서 서로 쳐다보고 끄덕인 후에, 어디로 우리를 데려가는지를 보기 위해 기차에 올라 탔습니다. 그 곳이 프린스턴이었고, 미네아폴리스였고, 시애틀이었고, 로스앤젤레스였고, 산타 로사였습니다. 매번 마다 부르심에 순종해서 살아갈 때 우리의 기쁨은 더 크게 발전해 나아갔습니다.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경우마다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좋지 않은 아이디어라는 수많은 이유들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신호를 수없이 무시하고 제 마음의 욕망대로 따른 적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크게 망하지 않은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경우에 제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의 음성과 뜻이 맞아서 더 쉬운 순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꽤 많은 젊은 목사들과 접촉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 친구들이 잘 끝낼 수 있도록 도움이 필요한 죽어가는 교회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경이롭게 보았습니다. 때로는 풀타임 목회지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파트타임 목회지로. 대륙을 횡단하여 가족들과 함께 사역지를 옮기는 것도. 수십 년간 한 교회를 잘 섬기다가, 대학교 근처에서 학원목회를 하거나 청소년 사역으로 돌아가는 것. 이런 일들은 최소한 처음에는 그들의 마음의 소원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부르심은 원래의 기도는 “하나님, 저를 안전한 도시에 있는 다양하고 건강한 교회, 재정적으로 안정되었고 장래 가능성이 있는 교회로 보내 주시옵소서. 주여, 그 곳에 보내 주시옵소서. 제가 이삿짐을 싸겠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에 응답이 없을 때, 우리 친구들은 자기들 앞에 아직도 있는 순종의 질문을 발견하게 됩니다. 정말 쉬운 질문입니다.

마가복음 5장의 정말 재미있는 부분은 예수님이 청년의 요구에 ‘아니야’라고 대답하시고 다른 사역을 주실 때, 그 청년은 실제로 가서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 청년 주위 이웃들, 정말 복음을 전하기 가장 어려운 사람들, 에게 주 예수께서 자신에게 보여준 자비에 대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놀랐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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